[변호사 칼럼] 능력주의의 허상 - 신분제를 재생산하는 공정의 탈
오늘날 우리는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사회’를 이상적인 구조로 여긴다.
어떤 배경에서 태어났든, 스스로 노력하고 실력을 쌓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숨어 있다.
능력주의는 공정의 이름으로 불공정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그 결과 현대사회는 새로운 형태의 ‘신분제’로 변모하고 있다.
출발선은 평등했는가?
능력주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출발선에서 경쟁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부모의 소득, 학력, 거주 지역, 정보력, 인맥은 자녀의 교육과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실상은 출발선이 다른 경쟁의 결과물이다.
소득 상위층 자녀는 풍부한 사교육, 안전한 주거, 다양한 진로 체험, 실패를 보완할 자원을 갖는다.
반면 저소득층 자녀는 기초적인 학습 환경조차 불안정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아이에게 “노력하면 된다”고 말한다.
출발선이 다르면, 노력은 기회의 대체가 될 수 없다.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신분제로 발전한다
더구나, 이런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신분제로 발전하는데 더 문제가 있다.
과거의 신분제는 혈통으로 신분이 고정되었지만, 오늘날의 신분제는 ‘능력’이라는 이름 아래 세습되고 있다.
문제는 이 구조가 “공정”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교묘하다는 점이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낙인찍힌 사람은 실패를 자기 탓으로 돌리고 침묵한다.
사회는 그들을 돕는 대신, 능력부족, 경쟁도태라고 말한다. 마치 공정한 게임에서 패배했으니 결과를 수긍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때론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냉혹한 구조다.
책임은 사회가 만들고, 처벌은 개인이 받는다.
게다가 능력주의 사회에선 실패한 사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자녀들까지도 동일한 조건에서 다시 경쟁에 내몰린다.
불평등은 세습되고, 계층 이동은 점점 사라진다.
능력주의는 결국 계층 고정화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장치가 된다.
능력에 따른 보상은 당연하나, 신분제로 변해서는 안된다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신분제를 만드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성공한 후, 자녀를 좋은 환경에서 키워 다시 경쟁우위를 갖추게 하는 것이야 당연하고 인간의 본능이다. 나라도 그렇게 한다.
그러나, 지금 내 능력이 부족했다고 하여, 내 자녀까지 그대로 물려받는 사회라면 미래가 있을까? 아인슈타인의 재능을 지녔더라도,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면 막노동 현장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는가?
또 다시 중세 신분제 나라가 된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그냥 노비, 평민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양육, 교육에 대한 국가 책임이 대두한다.
여기서, 바로 국가의 교육과 양육 책임화가 문제된다.
능력주의가 정당하려면 최소한 출발선은 비슷해야 한다.
없이 살아도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게는 해 줘야 한다.
출생의 배경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짓지 않도록, 국가는 보육, 교육, 의료, 주거 등 삶의 가장 기초적인 기반을 안정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그러면에서, 다듬어야할 사회제도가 많다. 특히 현재 수시위주 입시제도는 능력주의에 유리한 것이 아닌지 급히 짚어볼 문제다.
이것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다.
도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이다.
불안한 사람은 도전하지 못하고, 도전하지 않는 사회는 정체한다.
능력주의의 허상에 빠지면 안된다.
요즘 20대가 능력주의를 추종한다고들 한다.
젊은 나이엔 좋은 학벌과 직장이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질 수 있다. 당연히 나보다 좋은 학벌,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은 부럽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당신이 못나서 그렇게 된 것일까?
당신도 많이 배운 부모, 돈 많은 가정에서 태어낫다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당신의 절대 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구조가 그렇게 짜여서 있어서 힘들 가능성이 더 높다.
당신 탓을 하지 말라.
그리고, 좋은 학벌, 좋은 직장을 동경하지도 말고, 우상화할 필요도 없다.
사실 그런 사람이 당신보다 낫지도 않다.
그것을 강조하는 정치집단에게는 표를 주어서도 안된다.
지금 이 사회에서 고민해야 할 부분은 그런 사회구조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 자녀에게는 더 이상 그런 사회를 물려주지 않을 고민을 하자.
당신 혼자서는 못하니 그런 고민을 조금이라도 하는 정치집단을 지지하자.
그 정도가 최선이다.
우리는 이제 묻고 시작해야 한다.
그 사람은 왜 능력을 펼칠 수 없었는가?
그 아이는 왜 경쟁에 참여조차 할 수 없었는가?
우리는 실패한 사람에게 사회적 복구의 기회를 주었는가?
공정한 사회는 능력에 따라 상을 주는 사회가 아니다.
출발선이 다르지 않고, 실패해도 회복 가능한 사회다.
성공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은 평등해야 한다.
그리고 그 존엄을 지키는 사회는,
능력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그것을 못하면 한국사회의 미래는 단언코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