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8

[변호사 칼럼] 진보와 보수, 문명을 움직이는 두 리듬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말은 언제나 대립의 언어로 쓰인다.

진보는 약자의 편, 보수는 기득권의 편이라는 도식은 교과서처럼 반복된다.

마치 진실처럼 들린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건 정치적 편의에 맞춘 단순화일 뿐이다.

진보와 보수의 본질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서로를 부정하는 두 진영이 아니라,

문명이 균형을 유지하며 진화하기 위한 두 리듬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변화의 힘으로서 진보

진보는 세상을 바꾸려는 힘이다.

즉, 기존 질서에서 더 나은 새로운 질서로 가기 위한 운동이다.

새로운 가치, 제도, 기술, 관계를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하려는 의지다.

산업혁명기의 진보가 노동자의 권리를 외쳤던 이유는, 그 시대의 불의가 ‘계급 구조의 고착’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는 종종 노동자의 편에 서 있었지만, 그건 진보의 본질이 ‘노동자’라는 신분의 편이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 시절 불합리한 권력 구조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는 불합리한 권력구조에서 언제나 약자일 가능성이 높으니 지금도 진보는 대개 노동자들의 편이긴 하다.

그러나, 진보의 본질은 계급에 대한 부정일 뿐이다.

계급이 무엇인가? 고대, 중세의 노비제, 신분제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부정이고, 반드시 사회가 퇴보하도록 만든다.

계급제, 신분제로 점철된 인간사회가 수천년간 거의 발전하지 못하다가, 계급제, 신분제의 폐지와 함께 불과 200여년만에 문명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것이 바로 그 증거 아니겠는가?

자본주의 초창기 자본가들이 돈으로 계급을 형성하면서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그들이 돈으로 새로운 신분제도를 만들려 했기 때문에, 그 시기에는 진보주의자들이 노동자들 편에 서 저항하면서 균형을 외친 것이다.

그러나, 진보의 본질은 계급, 신분의 부정일 뿐이지, 노동자편이 아니다.

자본가 계급이든, 혹은 노동자 내부에서 새로 생긴 특권 계급이든 상관없다.

노동자들 내부에서 또 다른 계급을 만든다면 그것도 계급이다. 이 또한 진보를 위하여 타파해야 할 부분일 뿐이다.

결국, 진보의 본질은 ‘약자를 위한 정치’가 아니다.

그 본질은 권력이 고착화되는 메커니즘 자체를 끊임없이 해체하려는 태도다.

고착화된 권력, 역동성을 잃은 사회는 발전하지 못하고 타락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절대권력이 되어 버린다.

절대권력은 언제나 부패한다. 이건 역사의 진리다.

그리고, 대개 고착화된 권력의 피해자가 약자이니 약자의 편으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진보는 늘 불편한 진영이다.

한 번 이겨도 다시 자신을 의심해야 한다.

(1) 진보의 적은 언제나 외부에만 있지 않다.

자신이 권력이 되는 순간, 그 자신도 기득권화가 될 수 있으니 성찰의 대상이 된다.

(2) 오늘날 진보가 기술, AI, 데이터 혁신을 밀어붙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존의 권력 질서를 흔들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겠다는 본능이다.

(3) 현재 검찰, 사법부 개혁도 오랫동안 고착화된 권력구조를 바꿔 보겠다는 생각의 발현이다.

그러나, 진보는 인간의 현실을 바꾸려는 시도이기에, 언제나 혼란을 동반한다.

뭐가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다.

그래서 진보의 길은 늘 시끄럽고, 논쟁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바로 그 시끄러움 속에서 사회는 성장한다.

질서의 기억으로서 보수

보수는 그 반대편에서 속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변화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제도는 사람보다 느리고, 관습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보수는 그 느림을 존중하는 사유다.

그러나, 느림을 존중한다고 하여, 과거의 유산을 고집한다는 뜻이 아니다.

보수의 본질은 너무 빠른 변화로 문명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제동장치를 유지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문제는 보수가

- 속도의 제동을 ‘자기보존의 방패’로 바꾸거나,

- 이미 과거의 유산이 된 철 지난 과거 이념을 지키려 할 때이다.

이건 변화의 속도 조절론자로서의 보수가 아니라, 보수의 부작용이다.

질서가 곧 자신의 이익이 되고, 세상의 변화를 보지 못하고 과거에 갇혀 있다면,

보수는 철학이 아니라 방어기제가 되고, 지난 시대의 향수일 뿐이다.

(1) 그때부터 보수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자기 안락을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즉, 기득권을 지키는 세력이 되는 것이다. 현재, 집값에 목매는 것도 경제적 기득권에 얽매인 보수의 부작용이다. 이 또한 기득권의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2) 또한, 일부 아직도 산업화시대의 추억에 빠진 사람들도, 이미 그 시대를 한참 지난 우리나라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너무 오래된 과거인 산업화시대의 성장신화에 아직도 갇혀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리듬이 사라진 사회

지금 한국의 정치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진보와 보수가 변화추구, 변화의 속도조절이라는 서로의 본질을 망각한 채,

그 리듬을 잃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변화와 제어”의 두 축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부정해야만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정체성 게임에 빠져 있다.

이념은 실종되고, 감정만 남았다.

누가 옳은가보다 누가 ‘우리 편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정치세력은 이익과 감정을 이용해 국민을 진영으로 끌어들인다.

인간의 본능을 이용해 정치판에 단기이익을 끌어들이고, 편가르기 감정을 부추기는 것은, 나라의 이익을 위한다고 하는 정치인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될 짓이나, 지금은 이 또한 서슴치 않는다.

정치가 논쟁이 아니라 팬덤이 되고, 언론은 중재가 아니라 중계가 되었다.

진보는 보수를 반동이라 부르고,

보수는 진보를 선동이라 부른다.

이건 마치 적국과의 싸움과 같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둘 다, 상대가 없다면 자기 의미를 잃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를 파괴하려 한다.

이건 대립이 아니라 공멸의 구조다.

문명의 리듬을 회복해야

민주주의는 본래 이 두 리듬의 균형 위에서 작동한다.

진보가 불을 지피면, 보수가 그 불을 다스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는 한 단계 더 세련된 형태로 나아간다.

이 리듬이 유지될 때, 사회는 변화 속의 안정, 안정 속의 변화를 경험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진영이 아니라,

사유의 품격을 되찾는 시민들이다.

진보가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고,

보수가 그 속도를 조절하는 사회라면,

우리는 더 이상 진영에 묶이지 않고 문명의 호흡에 귀 기울일 수 있다.

결국 문명은 싸움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균형을 되찾으려는 노력, 그 반복 속에서 성숙한다.

진보와 보수는 서로를 파괴하는 적이 아니라, 서로를 존재하게 만드는 짝이다.

한쪽이 사라지면, 다른 한쪽도 의미를 잃는다.

진보가 미래를 향해 문을 열고,

보수가 그 문이 넘어지지 않게 받쳐준다.

이 두 리듬이 함께할 때,

우리는 혼돈이 아닌 조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게 바로 문명이 지속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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