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7

[변호사 칼럼] 함수에서 구조로 - 사무직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1. 1985년의 사무실, 작은 양극화

1980년대 후반 한국 사무실에 엑셀이 들어왔다. 그때 한 사람이 사라지고 한 사람이 부상했다. 종이장부에 숫자를 옮겨 적던 경리직원은 천천히 사라졌고, 엑셀을 다룰 줄 아는 직원은 빠르게 부상했다. 사무직 안에서 작은 양극화가 일어났다. 그 양극화의 비율은 대략 10대 1이었다. 함수를 잘 짜는 한 명이 못 짜는 열 명의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40년 후, 같은 일이 한 자릿수 더 큰 규모로 반복되려 한다. 다른 점은 그릇의 크기뿐이다.


2. 세 층으로 갈라지는 노동시장

AI 에이전트가 본격 보급되면 노동시장은 세 층으로 갈라진다.

(1) 상층은 구조를 장악한 사람들이다. 자기 영역의 일을 구조로 분해하고, 그 구조를 AI 에이전트에 명세하고, 결과를 구조적으로 검증할 줄 아는 사람들. 인구 비중은 상위 1~5%에 불과하지만 가치는 폭발적으로 커진다.

(2) 하층은 비구조적·신체적·맥락의존적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돌봄, 현장 서비스, 일부 수공 작업. AI가 들어오기 어렵고, 로봇이 들어오는 데도 시간이 한참 걸린다. 임금은 낮지만 자리는 남는다.

(3) 문제는 그 사이의 중층이다. 사무직, 일반 분석직, 기초 전문직. 보고서를 쓰고, 데이터를 정리하고, 계약서를 검토하고, 1차 자문을 작성하고, 표준화된 고객 응대를 한다. 한국 화이트칼라의 절대다수가 여기 있다. 그리고 이 층이 이번 변화에서 가장 빠르게 사라진다.


3. 왜 하필 중간층인가


두 가지 이유가 겹친다.

첫째, 중간층의 일은 구조적이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정해진 결과를 산출하는" 작업이다. 이건 AI가 가장 잘 흡수하는 영역이다.

둘째, 그러나 중간층은 그 구조를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 만들어진 구조를 따라 실행할 뿐이다. 이게 결정적이다. 구조를 만드는 사람은 살아남는다. 구조를 따라 실행하기만 하던 사람은 AI에게 자리를 내준다.

엑셀 시대에는 함수를 짜는 사람과 입력만 하는 사람이 갈렸다. AI 시대에는 에이전트를 설계하는 사람과 에이전트가 처리할 일을 하던 사람이 갈린다. 후자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진다. 에이전트와 직접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속도에서도 비용에서도 인간은 진다.


4. 레버리지의 폭발

엑셀이 일으킨 양극화의 레버리지가 10대 1이었다면, AI 에이전트는 100대 1, 어쩌면 1000대 1이다. 엑셀은 데이터 처리를 도와주는 도구였기에 그래도 인간의 영역이 남아 있었지만, AI 에이전트는 노동 자체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10명을 1명이 대체하는 변화는 경제학자들이 "기술 실업"이라 부르는 익숙한 현상이다. 사회가 흡수할 수 있다. 하지만 100명을 1명이 대체하는 변화는 구조적으로 다른 사건이다. 흡수가 일어나기 전에 충격이 먼저 온다.


5. 실제 일어나는 일들


법률 시장은 이 변화를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다. 표준 계약서 검토, 1차 판례 검색, 단순 자문 작성. 이건 이미 AI가 더 빠르고 더 싸게 한다. 변호사가 살아남는 길은 둘이다.

하나는 법률 시스템 전체의 구조를 장악하고 AI를 부리는 변호사. 어떤 사건에 어떤 법리·증거·전략을 쌓을지 설계하고, 그 실행은 AI 에이전트에게 위임하는 변호사다.

또 하나는 법정에서 판사와 배심을 인간으로서 설득하는 변호사.

두 길의 공통점은 자동화 불가능한 영역에 자기 가치의 무게중심을 옮겼다는 점이다.

그 사이의 변호사, 표준 업무를 충실히 처리하던 중간층의 자리는 빠르게 줄어든다. 다른 직역도 다르지 않다. 회계, 마케팅, 광고, 일반 컨설팅, 행정. 같은 압력이 같은 속도로 작동한다.


6. 새 시대의 자격증


엑셀 시대 사무직 자격증은 "함수를 짤 줄 아는가"였다.

AI 시대 자격증은 "구조를 짤 줄 아는가"가 된다.

자기 영역의 일을 구조로 분해하는 능력, 그 구조를 AI에게 명세할 수 있는 능력, 결과의 구조적 결함을 발견하는 능력. 이건 별도의 메타역량이며, 학교가 가르치지 않는다.

40년 전 엑셀 앞에서 어떤 사무직원은 함수를 배웠고 어떤 사무직원은 못 배웠다.

그 결과는 30년의 직장생활에 걸쳐 천천히, 그러나 결정적으로 갈렸다.

지금 우리 앞에는 한 자릿수 더 큰 그릇의 같은 시험이 놓여 있다. 다른 점은 이번엔 함수가 아니라 구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더 적게 남았다는 것이다.

법무법인 한백 변호사 이진화변호사 이진화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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