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7

[변호사 칼럼] 재판과 수사에서 객관적 진실이라는 신화에 대하여

객관적 진실을 추구한다는 자연과학의 세계에서 ‘객관적 진실’에 도달하는 길은 사실 험난하다. 우주의 원리는 그대로 있지만, 그것을 관찰하는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렌즈의 위험성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의 원리가 보편적 진실로 받아들여지기까지 수많은 검증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 이유는 과학자들 스스로 인간의 불완전성을 잘 알기에 인간의 노이즈를 제거한 수학적, 실험적 검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함부로 진실이라 얘기하지 않고, 정밀한 검증을 거쳐도 그 진실이 깨지는 경우도 있기에 진실앞에 겸손하다.


그런데 인간이 진실을 직접 정의하고 집행하는 사회과학, 즉 법학의 영역은 어떨까? 사실 법학만큼 인간의 노이즈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곳도 없다. 과거의 사건은 이미 소멸했고, 남은 것은 파편화된 증거뿐이다. 법률가는 이 파편을 보고 "아마 이랬을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필터가 개입되기에 노이즈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법원과 검찰은 자신들의 판단이 마치 ‘불변의 과학적 진실’인 양 권위를 세우곤 한다.


평소 과학적 사고를 강조하는 필자가 현장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자면 그 모습이 사뭇 우습게 보일 정도다.

법학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양자역학의 ‘관측자 효과(Observer Effect)’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입자가 관측되기 전까지는 여러 상태가 겹쳐 있다가, 관측하는 순간 그 상태가 고정되듯이, 사건 또한 검찰의 ‘기소’라는 관측이 시작으로 그 성격이 규정되기 시작하고, 법원이 판결하는 순간 상태가 결정된다.


물론, 재판에서 공방이라는 검증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려고 하나, 법원과 검찰이 어떤 대전제를 가지고 사건을 바라보느냐가 진실의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판결문에서 마주하는 진실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검사와 판사라는 관측자에 의해 선택된 ‘양자화된 결과물’일 뿐이다. 이것을 객관적 진실이라 하는 것은, 8비트로 샘플링된 거친 음원을 듣고 오케스트라의 실연을 완벽히 복원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사실 법적 진실은 실물 지형이 아니라 지도에 가깝다. 지도가 길을 찾기 위해 땅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까지 모두 묘사하지 않고 추상화 하듯이, 법적 진실도 사회적 평화를 위해 적당한 생략을 통해 진실을 정의한다.

이 과정은 사회적 평화를 위한 효율적 시스템일 수는 있어도, 결코 ‘객관적 진실’ 그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진실을 정의한다는 본질상 객관적 진실이 아닐 위험성은 항상 내포되어 있다. 지도는 목적에 따라 실제 지형을 왜곡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오늘날 정치의 사법화로 판결문과 기소장을 객관적 진실이라 내세우고, 또한 그렇게 믿는 현상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이건 판결문과 기소장이라는 도구로 인간의 확증편향 심리를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심리게임 밖에 안된다.


법원 판결이나 검찰의 결정은 그냥 사회적 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사법절차에서 생겨나는 불완전한 진실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진실이 밝혀지기도 하지만, 때론 거짓이 진실로 취급받기도 하고, 진실이 거짓으로 오명을 쓰기도 한다. 이건 인간이 진실을 정의하는 사법절차가 가진 필연적 한계다.


그런데 지도를 그린 법원과 검찰이 “이것이 곧 땅이다”라고 우기며 그 오차를 인정하지 않고, 정치인들이 이를 선동한다면, 그 지도를 믿고 길을 떠난 국민들은 낭떠러지를 마주할 뿐이다. 천동설을 진실이라 외친 중세 교회가 중세 암흑의 1,000년을 만들었듯이 세상의 변화와 발전을 막을 뿐이다.


법학은 진실을 독점하는 과학이 아니라, 노이즈 속에서 최선의 합의를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판결문이라는 결과값 뒤에 숨겨진 인간의 편향과 시스템의 오차를 인정해야 하고, 이것을 읽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진실 앞에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법무법인 한백 변호사 이진화변호사 이진화 서명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