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7
[변호사 칼럼] 천체 식별과 법정의 사실인정의 유사성
1. 들어가며
법정에서 한 장의 혈흔 사진만으로 유죄를 선고하는 판사는 없다. 혈액형이 일치해도 DNA가 맞아야 하고, DNA가 맞아도 현장에 있었다는 정황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정황이 있어도 피고의 진술과 부합하는 맥락이 필요하다.
하나의 증거는 의심을 깨기엔 언제나 부족하다. 법원이 유죄의 확신에 이르는 길은 결국 여러 독립 증거의 수렴을 요구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130억 년 전의 빛을 식별하는 천문학자의 작업도 정확히 이 구조를 따른다. 과학과 법이, 다루는 대상은 전혀 다르지만 진리에 다가가는 인식의 절차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2. 천체의 식별 원리와 법정의 사실인정 원리의 유사성
제임스웹 우주망원경(JWST)은 적외선을 관측한다.
그런데 적외선을 내뿜는 천체는 한 종류가 아니다. 지구에서 수십 광년 거리의 차가운 갈색왜성도 적외선을 뿜고, 130억 년 전 갓 태어난 은하의 빛도 우주 팽창에 따른 적색편이로 파장이 늘어나 적외선으로 지구에 도달한다.
같은 2마이크로미터짜리 광자 한 개만 놓고 보면, 그것이 '가까운 차가운 별'에서 온 것인지 '우주의 새벽에서 온 130억 년짜리 편지'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다.
이는 법정에서 '범죄현장에 남은 혈흔 한 방울'을 들여다보는 상황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광자 하나, 혈흔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천문학자들은 매년 수천 개의 천체를 정밀하게 식별한다. 그들이 쓰는 도구가 바로 여섯 갈래 감별 지표의 교차검증이다.
가. 첫째, 스펙트럼 분석 - 빛의 지문
모든 원소는 자기만의 고유한 흡수·방출선 패턴을 가진다. 수소는 수소만의, 철은 철만의 파장대에서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한다. 이를 '스펙트럼선'이라 한다.
이는 법정의 필적감정과 정확히 같은 구조다. 글자 크기가 달라져도 획순과 꺾임 각도, 글자 간 비율은 개인별 고유 패턴으로 유지된다. 스펙트럼선도 적색편이로 전체 파장이 이동해도, 선들 사이의 상대적 간격이라는 '패턴'은 불변이다. 이 불변량이 원소를 식별하고, 이동량이 우주의 팽창량 곧 거리를 증언한다.
나. 둘째, 다파장 측광 - 여러 조명 아래의 감식
스펙트럼 분석은 정밀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빠른 1차 선별을 위해 천문학자들은 여러 파장대의 필터로 같은 천체를 여러 번 촬영한 뒤, 필터별 밝기 비율을 비교한다. 가장 먼 은하들은 수소가 특정 자외선을 통째로 흡수해 만드는 '절벽' 때문에 짧은 파장 필터에선 안 보이다가 긴 파장 필터에서 갑자기 밝아진다. 이 비대칭이 결정적 단서가 된다.
이는 범죄현장을 일반광·자외선·적외선으로 번갈아 비추며 드러나는 흔적을 감별하는 과정과 같다. 단일 조명 아래서는 보이지 않던 단서가, 다각도의 빛 아래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단서의 본질은 '무엇이 보이는가'가 아니라 '어떤 조명에서 보이고 어떤 조명에서 사라지는가'에 있는 것이다.
다. 셋째, 공간적 형태 - 점인가 면인가
가까운 별은 아무리 큰 망원경으로 보아도 '점'으로 맺힌다. 반면 은하는 아무리 멀어도 약간 번진 '면'의 형태로 보인다. 형태 자체가 정체성의 1차 단서가 된다.
이는 현장 흔적이 발자국인지 타이어 자국인지를 즉시 판별해내는 법의학적 관찰과 같다. 형태학적 유형 그 자체가 증거의 범주를 규정한다.
라. 넷째, 주변 환경 - 어디에 박혀 있는가
천체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은하 원반 안쪽에 박힌 점광원은 대개 우리 은하 내부의 별이고, 은하 평면을 벗어난 방향에서 관측되는 점광원은 외부 은하일 가능성이 높다. 은하단 안에서 호 모양으로 휘어진 빛은, 앞쪽 은하단의 중력이 배후 먼 은하의 빛을 굴절시킨 '중력렌즈' 현상이다.
피고가 범행 시각에 현장 부근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범인은 아니지만, 다른 증거와 결합할 때 강력한 정황증거로 작동하는 것과 동일한 논리다. '어디에 있었느냐'는 그 자체로는 결정적이지 않지만, 다른 지표를 보강하는 골격이 된다.
마. 다섯째, 고유운동과 시차 - 시간을 들여 움직임을 본다
지구는 태양을 공전한다. 반년 뒤 다시 같은 하늘을 촬영하면, 가까운 별은 관측 각도의 변화로 위치가 살짝 다르게 맺힌다. 이를 '시차'라 하며, 거리 측정의 가장 직접적 방법이다. 먼 은하는 수십 년이 지나도 위치가 거의 불변한다.
움직이는가, 멈춰 있는가. 이 시간축 관찰은 법정의 알리바이 검증과 맞닿는다. 특정 시간대의 위치 변화 여부가 결정적 증거로 기능한다. 달리는 기차에서 창밖을 볼 때 가까운 전봇대는 빠르게 지나가고 먼 산은 거의 정지해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로, 시간은 거리를 구분해내는 냉정한 시약이다.
바. 여섯째, 표준 촛불 - 절대 기준과의 비교
일부 초신성이나 세페이드 변광성 같은 일부 천체는, 그 절대 밝기가 물리법칙에 의해 거의 일정하다. 100와트 전구임을 알고 있으면 어두워 보이는 정도만으로도 거리를 산출할 수 있다. 이를 '표준 촛불'이라 부른다.
이는 부동산 소송에서의 공시지가·감정평가 기준과 구조가 같다. 절대 기준치가 확보되어야 개별 물건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처럼, 표준 촛불이 있어야 개별 천체의 거리가 독립적으로 역산된다. 기준점의 존재는 그 자체로 사실 인정의 토대다.
3. 수렴의 원리와 자유심증주의
이 여섯 지표 중 어느 하나도 단독으로는 결정적이지 않다. 스펙트럼 한 번의 관측에는 오차가 있고, 색 지문은 여러 천체 종류에서 겹칠 수 있으며, 형태 판독은 해상도에 좌우되고, 위치 불변은 단순히 관측 기간이 짧은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섯 지표가 같은 결론을 가리킬 때, 그 결론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2024년 JWST가 관측 사상 가장 먼 은하로 확정한 JADES-GS-z14-0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세워졌다. 다파장 측광으로 후보를 선별하고, 분광기로 적색편이를 확정하고, 형태 분석으로 별이 아닌 은하임을 확인하고, 재관측으로 위치 불변을 검증했다. 네 갈래의 독립 증거가 한 점 '빅뱅 2억 9천만 년 후'을 가리켰을 때 비로소 이 '빛의 증언'은 과학계의 승인을 얻었다.
이는 우리 소송법의 자유심증주의와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증거의 증명력을 법관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기되, 그 판단이 '하나의 결정적 증거'가 아닌 '증거의 종합'에 기초해야 한다는 원칙. 법원이 요구하는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는 확신'도, 천문학이 요구하는 '독립 지표의 수렴'도, 결국 같은 인식론적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다만, 이렇게 어느 하나의 사실을 확정하는 과정은 쉽지 않은데, 때론 재판에서 너무 쉽게 사실인정을 하거나, 반대로 경험칙에 반대되는 사실인정을 하는 것을 보면, 과학을 좋아하는 법조인으로서 비극을 느낀다.
우리 법조계도 과학계에서 사실인정이 얼마나 엄격하게 이루어지는지 배워야 한다. 물론 자연과학이 아닌 법학에서 그 정도의 엄밀함을 요구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수준은 갖춰야 할 것이다.
4. 나가며
한 장의 사진, 한 방울의 혈흔, 한 개의 광자.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갈래의 독립된 증거가 같은 한 점을 가리킬 때, 비로소 '사실'이 세워진다.
130억 년 전의 빛을 증언대에 세우는 천문학의 방법과, 범죄현장의 진실을 복원하는 법정의 방법이 이처럼 맞닿는 지점, 이것이야말로 진리에 다가가는 인간 인식의 가장 근본적 구조가 아닐까.
과학과 법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실은 같은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법무법인 한백 변호사 이진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