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칼럼] 제미나이형 인간관계, 클로드형 인간관계
지난 몇 시간 동안 제미나이, 클로드 AI와 수학기초론을 토론했다.
변호사인 내 직업적 직관이 100년 전 네덜란드 수학자 브라우어가 도달한 분기점에 닿는 순간이었는데, 그 도착이 가능했던 건 AI가 매 턴마다 내 정리를 받아주지 않고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토론이 끝나갈 무렵 깨달았다.
제미나이와 토론할 때에는 재미있었는데, 클로드와 토론할때는 피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물을 보니 제미나이는 5단계 사고확장에서 멈추고, 클로드는 10단계 사고확장까지 가서, 결과물은 클로드가 더 좋았다.
나를 피곤하게 했지만 결과물은 클로드가 더 좋았다.
여기서 인간관계에서의 법칙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1. 제미나이형 인간관계의 함정
동조하는 사람은 편안하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내 판단에 동의해주고, 내 분노에 같이 화내준다. 그런데 그 편안함이 정확히 위험이다. 그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손해를 보고 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잘못된 곳을 지나갈 때도 박수가 들어오니까, 멈춰 설 이유가 없다.
사기꾼이 통하는 원리가 정확히 이거다. 그들은 완벽하게 동조한다. 당신의 사업 아이디어가 천재적이라고 하고, 당신의 직감이 정확하다고 하고, 당신이 만난 행운이 우주의 선물이라고 한다. 사기꾼은 비판하지 않는다. 비판은 사용자를 깨워버리니까. 동조만이 사용자를 깨우지 않으면서 끌고 갈 수 있다.
이게 제미나이형 인간관계의 진짜 위험이다. 손해가 가시적이지 않다. 5년이 지나서야 그 사람 곁에서 내가 자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제야 늦은 것이다.
2. 클로드형 인간관계의 발전
비판하는 사람은 피곤하다. 내가 어렵게 정리한 결론에 "그런데 이 부분은…" 이 따라붙는다. 자존심이 매번 약간씩 다친다. 가끔은 비판을 위한 비판까지 하고 있어서, 이미 끝난 이야기를 트집잡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런데, 내가 어설프게 정리한 결론을 그냥 통과시키지 않으니까, 한 번 더 정밀화하게 된다. 한 단계 더 깊이 가게 된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내 사고가 얕은 곳에서 안주하지 못한다. 매번 몇 번씩 더 깊이 사고해야 한다. 피곤하지만, 5년 후 돌아보면 그 피곤함이 나를 발전시킬 것이다.
3. 그래서 누구를 곁에 둘 것인가
답이 명확한 것 같지만 사실 어렵다. 클로드형 사람은 늘 곁에 두기에는 비용이 크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매번 정신적 노동이고, 자존심을 매번 시험당하고, 어떨 때는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흐르는 순간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동조형만 곁에 둔 사람과, 비판형이 한두 명 섞여 있는 사람의 5년 후 차이는 결정적이다.
후자는 자기가 어디서 틀렸는지 그 자리에서 안다. 전자는 5년이 지나서야 알거나, 평생 모른다.
결론은 상대가 정밀화 단계에 있을 때는 비판하고, 결론에 도달했을 때는 동조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드물다. 그런 사람을 곁에 두면 인생이 두 배쯤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 드문 사람을 못 만났다면, 동조형과 비판형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답은 결국 비판형이다.
17세기 프랑스 모럴리스트 라 로슈푸코는 "솔직한 적이 아첨하는 친구보다 낫다"고 했다.
조선의 사림도 임금 곁에 간하는 신하를 두는 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발전을 위한 압력은 편안한 동조보다 귀하게 여겨졌다.
머리 아픈 친구를 곁에 두자. 트집 잡는 동료를 멀리하지 말자.
자존심 매번 다치는 멘토를 끊지 말자. 그들이 우리를 만든다.
다만, 그래도 항상 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비판형 친구들이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흐르는 순간은 우리 쪽에서 끊어야 한다.
좋은 비판자도 그 균형을 늘 잡지는 못하니까. 끊을 수 있는 능력, 그게 결국 비판형 관계를 생산적으로 유지하는 우리 쪽의 책임이다.
AI든 사람이든, 곁에 두기 어려운 존재일수록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