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칼럼] 비방의 시대 민주주의는 진화한다.
중국 고사 새옹지마는 화와 복이 예측 불가능하게 뒤바뀐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변방의 노인이 잃은 말이 오랑캐 준마를 데리고 돌아왔고, 그 준마를 타던 아들이 낙마로 다리를 다쳤으나 덕분에 전쟁에 징집되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다.
지금의 재앙이 훗날의 복이 되고, 지금의 행운이 나중의 화근이 되기도 한다는 통찰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판을 보면 혐오감부터 치민다.
여야 정치인들은 국정 현안보다 상대방 비방에 열을 올린다. SNS에는 상대 진영을 향한 독설이 범람하고,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삿대질과 고성이 난무한다. 유권자들은 지쳤다. "정치인들은 왜 저 모양인가"라는 탄식이 일상이 되었다.
지금 이 광경은 분명 화(禍)처럼 보인다. 그러나 새옹지마의 관점에서 보면 이 극심한 대립이 장기적으로는 복(福)의 씨앗일 수 있다.
첫째, 비방과 대립은 권력 견제의 본질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치적 대립이 사라진 시대는 언제나 독재의 시대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 국회는 거수기였고 언론은 입을 다물었다. 표면적으로는 안정적이고 조용했지만, 그 침묵 속에서 민주주의는 질식했다. 오늘날의 시끄러운 대립은 적어도 권력이 독점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여당이 폭주하면 야당이 제동을 걸고, 야당이 무책임하면 여론이 응징한다. 이 과정이 불쾌하더라도,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둘째, 끝없는 비방은 유권자의 정치의식을 깨운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 유권자들은 지역·학연·혈연에 따라 기계적으로 투표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정치인들이 서로를 물어뜯는 과정에서 각 진영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유권자들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판단 능력을 키웠다. 2022년 대선에서 20대 남성의 투표 성향 변화, 2024년 총선에서의 지역주의 약화는 모두 이 과정의 산물이다. 정치인들의 비방이 역설적으로 유권자를 현명하게 만들었다. 화가 복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물론 반론은 존재한다. "대립이 지나치면 국정이 마비된다"는 우려다. 실제로 여야 극한 대립 속에서 민생 법안이 계류되고, 예산안 처리가 지연되는 일이 반복된다. 하지만 이 또한 새옹지마의 틀에서 재해석할 수 있다. 국정 마비라는 단기적 혼란이 장기적으로는 제도 개선의 계기가 된다. 국회선진화법, 패스트트랙 제도는 모두 극한 대립 끝에 탄생한 제도적 진화다. 정치적 혼란이 제도적 성숙을 낳은 것이다.
셋째, 대립 없는 정치는 무사안일로 귀결된다. 일본 자민당의 장기 집권 시기를 보라. 야당의 견제력이 약했던 1980~90년대, 일본 정치는 조용했지만 부패했다. 로키드 사건, 리쿠르트 스캔들 등 굵직한 정경유착 비리가 터졌지만, 정치권은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했다. 대립이 없으니 견제도 없었고, 견제가 없으니 부패가 만연했다. 한국의 시끄러운 정치판이 때로는 불쾌하지만, 그 소음 속에서 비리는 더 쉽게 드러난다. 화가 복을 낳는 또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변호사로서 법정에서 수없이 목격한 장면이 있다. 원고와 피고가 격렬히 다투는 과정에서 진실이 밝혀진다. 한쪽의 주장만 들으면 재판은 공정할 수 없다. 양쪽이 치열하게 맞서야 비로소 진실에 가까워진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여야가 서로를 물어뜯는 과정이 불쾌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진실이 드러나고 권력이 견제된다. 지금의 화가 훗날의 복이 되는 이유다.
새옹지마의 교훈은 명확하다.
지금 보기 흉한 정치적 대립이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단련시킨다. 비방 속에서 유권자는 깨어나고, 대립 속에서 제도는 진화하며, 소음 속에서 진실은 드러난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은 불쾌하다. 하지만 침묵하는 독재보다는 시끄러운 민주주의가 낫다는 것을, 역사는 이미 증명했다. 화와 복은 언제나 함께 온다. 지금의 정치적 혼란을 견디는 것이,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필연적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