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7

[변호사 칼럼] 호의가 빚이 될 때, 사람들은 도망친다

심리학에는 '호혜성의 원리'가 있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그런데 이 원리에는 전제가 하나 있다. 바로 '얼마를 돌려줘야 하는지'가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의를 받은 사람은, 그 보답의 크기와 방법이 불명확할 때 관계를 회피한다.
빚진 기분은 들지만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를 때, 인간은 채무자가 아니라 도망자가 된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나는 이 원리를 수없이 목격했다.

성공보수 약정 없이 사건을 수임하고 승소했을 때, 의뢰인들이 보이는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이다.

연락이 끊긴다. 승소 판결문을 전달한 뒤 감사 인사 한 통 남기고는, 마치 증발하듯 사라진다. 전화는 받지 않고, 문자는 읽씹이다. 이메일은 반송되지 않지만 답장은 오지 않는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승소시켜줬는데 왜 도망가는 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성공보수 약정이 없다는 건, 의뢰인 입장에서 '얼마를 줘야 하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변호사 보수는 시장에서 천차만별이다. 같은 사건도 어떤 변호사는 3천만 원을 받고, 어떤 변호사는 1억을 받는다. 약정이 없으면 의뢰인은 이 불확실성 속에 던져진다. 너무 적게 주면 염치없는 사람이 되고, 너무 많이 주면 호구가 된다. 그 사이 어디쯤이 적정선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적정 보답'을 찾는 대신 '관계 단절'을 선택한다. 갚아야 할 빚이 명확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빚을 갚는 게 아니라 채권자를 피한다.

한국 사회 전반에서도 이 패턴은 반복된다.
직장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나중에 밥 한번 사라'며 큰 도움을 줬다고 해보자. 부하직원은 감사하다. 하지만 '밥 한번'이 회식 삼겹살인지, 고급 일식당인지, 아니면 골프 라운딩까지 포함하는 건지 알 수 없다. 그 불확실성은 부담이 되고, 부담은 회피로 이어진다. 상사를 마주치면 어색해지고, 복도에서 보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호의를 베푼 상사는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지만, 부하직원은 그저 '갚을 방법을 모르겠다'는 심리적 압박에서 도망치는 것뿐이다.


 법률 시장에서 성공보수 약정은 바로 이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장치다.
'승소하면 소송가액의 10%를 드립니다'라는 문장 하나가, 의뢰인에게는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갚아야 할 빚의 크기가 명확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빚이 아니라 계약이 된다.
계약은 이행하면 그만이다. 부담이 아니라 책임이 되고, 회피가 아니라 수행이 된다.
역설적이게도, 명확한 보상 체계가 있을 때 사람들은 오히려 더 편안하게 관계를 유지한다.
성공보수 약정이 있는 의뢰인은 승소 후에도 연락을 잘 받는다. 약정금을 지급하고 나면, 그들은 당당하다. 빚을 갚았으니까.

그런데 성공보수 약정 없이 승소시킨 변호사는 어떻게 될까.
그는 의뢰인에게 '명확하지 않은 빚'을 지운 사람이 된다.
의뢰인은 변호사에게 감사하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워한다.
연락을 할 때마다 '이번엔 뭘 요구하려나' '얼마를 달라고 할까' 하는 불안이 따라온다. 그래서 연락을 끊는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나는 그저 도와줬을 뿐인데, 왜 나를 피하는가. 하지만 의뢰인 입장에서는 합리적 선택이다. 불명확한 빚은, 명확한 빚보다 훨씬 무겁다.

성공보수 약정은 변호사를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다. 의뢰인을 보호하는 장치다.

보답의 크기를 명확히 하는 것은, 호의를 베푼 사람이 아니라 호의를 받은 사람에게 필요하다.
사람들은 빚을 지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빚졌는지 모르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도망친다. 변호사가 성공보수 약정 없이 승소시켰을 때 의뢰인이 연락을 끊는 건, 배은망덕해서가 아니다. 인간 심리의 자연스러운 회피 본능일 뿐이다. 명확한 보상 경로가 없을 때, 사람들은 관계를 유지하는 대신 관계를 끊는다. 그게 더 편하니까.

법무법인 한백 변호사 이진화변호사 이진화 서명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