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7
[변호사 칼럼] 예니체리에서 읽는 검찰개혁에 대한 심심한 위로
1826년 여름, 오스만 술탄 마흐무드 2세는 자신을 지키라고 만든 군대를 향해 대포를 쏘았다. 예니체리. 제국이 정복의 영광을 누리던 시절, 술탄이 봉건 기병 귀족의 무력을 꺾고 중앙집권을 세우기 위해 손수 길러낸 정예 상비군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칼은 칼자루를 쥔 손을 겨누기 시작했다. 1622년에는 군단을 개혁하려던 술탄 오스만 2세를 끌어내려 살해했다. 주인이 도구를 만들었는데, 도구가 주인을 갈아치우는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검찰개혁을 둘러싼 우리의 교착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4세기 전 이야기의 구조를 봐야 한다. 검찰과 예니체리는 표면이 전혀 다르지만, 그 아래 작동하는 뼈대는 거의 같다.
그리고 그 뼈대가 같기 때문에, 개혁의 어려움도 같은 방식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어려움을 겪더라도 우리의 잘못이 아님을 말해주고 싶다. 이건 원래 구조적으로 어려운 일이고, 역사가 이미 말해주고 있다는 점을.
하나씩 차근 차근 보자.
먼저, 권력의 도구가 왜 사라지지 않았는지 보자.
집중된 권력이 만들어 낸 강제 도구는, 그 권력이 약해지고 흩어져도 함께 흩어지지 않는다. 예니체리는 술탄 개인 권력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제국이 쇠퇴하고 술탄의 장악력이 무너졌을 때, 군단은 함께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결혼과 세습이 허용되고, 급료 증서가 사고팔리는 금융 자산이 되고, 상업과 길드에 뿌리를 내리면서 사회 전체로 번졌다. 종교 교단과 결합해 정당성의 외피까지 둘렀다. 통제하던 손이 사라진 자리에서, 도구는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자율 권력으로 떠올랐다.
한국 검찰의 궤적은 이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하다. 검찰은 권위주의 정권이 정적을 처리하던 칼이었다. 그러나 민주화는 그 칼을 휘두르던 독재권력이라는 손을 녹여 없앴을 뿐, 칼 자체를 거두지는 못했다. 명령권은 분산되었지만 검찰이 축적한 독점과 인적 네트워크는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통제하던 권력이 사라진 그 빈자리에서, 도구는 자율 권력으로 일어섰다. 예니체리에게 일어난 일이 한 세대 전 이 땅에서 다시 일어난 것이다.
다음으로, 이 도구의 개혁이 왜 어려운지 보자.
도구의 개혁이 어려운 것은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구조가 세 겹의 자물쇠를 걸어 두었기 때문이다.
첫째, 자기를 벨 수 없는 칼이다. 개혁은 누군가가 집행해야 한다. 그런데 검찰의 비위를 수사하고 기소할 주체가 다시 검찰이었다. 기소독점주의라는 명문의 빗장이 여기에 있다. 예니체리의 순환, 즉 유일한 무력이 곧 개혁 대상이었던 것을 검찰은 법리의 형태로 더 깔끔하게 갖고 있었던 셈이다. 가위로 그 가위 자신을 자를 수는 없다.
둘째, 저항의 연합이 검사 집단보다 훨씬 크다. 전관예우, 법조·정치·기업 법무로 뻗은 인적 망, 혼맥으로 엮인 관계들. 검찰의 그물은 제도 바깥으로 넓게 퍼져 있다. 그래서 개혁이 위협하는 대상은 현직 검사에 그치지 않는다. 예니체리의 급료 증서가 비전투원까지 수혜자로 끌어들였듯, 검찰 네트워크도 훨씬 넓은 이해관계의 연합을 만들어 두었다.
셋째, 정당성이 근대국가의 기초 원리에 융합되어 있다. 예니체리는 종교와 제국의 영광에 자신을 묶어 두어, 그들을 치는 일이 곧 제국의 기둥을 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검찰은 '법치의 수호'에 자신을 묶었다. 검찰을 건드리는 일이 곧 법치를 흔드는 것으로 읽히는 구조다. 이 셋이 맞물리면, 정상적인 경로로는 개혁의 분모가 0이 된다. 그리고 0으로 나눈 난이도는 무한대로 발산한다.
여기서, 마흐무드는 "평행한 길을 먼저 내는 방법"을 취했다.
마흐무드 2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군단과 정면으로 부딪치기 전에, 충성스러운 신식 포병대라는 대체 무력을 수년에 걸쳐 길렀고, 종교 지도자들의 파트와로 대체 정당성까지 확보했다. 의존이 끊긴 다음에야 비로소 칼을 들었다.
흥미롭게도, 우리의 검찰개혁 과정도 이 과정이었다. 검경 수사권 조정은 경찰이라는 평행한 수사 주체에게 권한을 넘겨 수사 독점을 흔드는 시도였고, 공수처는 검찰을 수사·기소할 수 있는 외부의 평행 기구를 세우려는 시도였다. 현실의 개혁이 이론이 예측한 경로를 그대로 밟았다는 사실 자체가, 두 권력이 같은 구조 위에 서 있음을 거꾸로 증명한다.
그런데, 어려움에 결정적 차이가 있다. 검찰은 민주국가에서 하나의 법치주의 실현 조직이라 예니체리처럼 대포로 끝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냥 없애면 쉽고 편하지만, 권한의 배분을 다시 설계해야 할 대상이라 더 어렵다. 이 차이로, 검찰개혁은 길고 지루한 제도 설계일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어려웠던 것이다.
우리는 노무현, 문재인 정권의 검찰 개혁 실패를 탓하지만, 원래 한번에 할 수 없었다. 수사권 조정, 공수처 부터 접근하는 것이 원래 맞았고 정석 코스였다. 그리고, 지금 최종 단계에서의 혼란, 이것도 없앨수는 없는 제도의 권한 배분이라 어려운 것이다.
검찰개혁에 대해 과거 그리고 지금의 혼란을 탓하지 말자. 이 일이 어려운 것은 누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구조가 원래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권한 배분으로 검찰개혁에 마침표를 찍으려고 한다.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자율 권력을, 시민이 통제할 수 있는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 예니체리 해체가 술탄 개인에게 권력을 돌려준 일이었다면, 검찰개혁은 그 권력을 민주적 통제 아래 두는 일이다. 방향은 정반대지만, 둘 다 '주인 없이 떠도는 칼을 다시 손이 닿는 곳에 두는' 동일한 과제다.
물론, 여기서 깔끔하게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좌절하지 말자. 원래 어려운 문제는 쉽게 안 풀린다. 역사는 예니체리의 해체로 끝났다. 검찰의 끝도 이미 정해져 있다.
법무법인 한백 변호사 이진화
